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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와 일상

원조 기상캐스트 김동완씨 별세

by 날씨안녕 2024. 9.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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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제1호 기상캐스터인 김동완 씨가 별세했습니다. 향년 89세. 저는 이분이 방송하던 모습이 어렴풋이 떠오르네요. 내일의 날씨는 당연히 김동완 씨의 설명을 듣고 대비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이 분의 방송이 끝나면 엄마가 내일은 우산을 꼭 챙겨야 한다, 덥구나 하는 말씀을 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김동안기상캐스터

기상캐스터가 되다

김동완 씨는 1935년 경북 김천에서 태어났습니다. 1958년 우연히 국립중앙관상대 국립기상기술원 양성생 모집 공고를 보고 응시해 15대 1의 경쟁률을 뚫고 합격했습니다.

1959년 국립기상기술원 양성소를 수료한 뒤 김포국제공항 측후소와 부산 수영비행장 측후소 근무를 거쳐 서울로 올라가 관상대 예보관으로 활동했습니다.  그러다가 1967년부터 라디오에 나오게 됩니다. 중앙관상대 직원이 방송국과 직통전화로 날씨보도를 거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김동완 씨는 1967년 3일에 한 번씩 교대로 돌아가며 하는 방송요원으로 뽑혔고, KBS 라디오의 어업 기상통보관으로 방송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청취자들이 날씨 방송을 듣게 하려고 일상생활과 날씨의 관계를 고민하게 되었고 다양하고 재미있는 표현을 시도하였습니다. ‘여우가 시집가는 날’ ‘파리가 조는 듯한 더위’ 같은 말들을 만들어냈습니다. ‘체감온도’라는 말도 그가 가장 먼저 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기상캐스터의 삶


기상청의 '기상통보관'이라는 직책도 없었는데 고인 때문에 만들어진 직책이라고 합니다.
1970년대에 들어 동양방송과 문화방송에서도 제1호 기상캐스터로 활약했습니다. 이후 1982년에 MBC의 요청에 따라 기상청을 그만두고 MBC기상보도요원으로 전직하게 됩니다. 이후 방송에서 일기예보를 전달하며 김동완기상캐스트로서의 삶을 살게 됩니다.

그는 손으로 일기도를 그리면서 설명하는 등 날씨를 쉽게 전달하기 위해 노력했고, 지금의 날씨예보 방송의 토대를 만들었다고 인정받고 있습니다. 그간의 공을 인정받아 2010년 세계 기상의 날에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상했습니다.

제가 기억나는 일화로 그는 우산을 함부로 들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가 다른 이유로 우산을 들고 가도 사람들이 다 비가 올 것으로 예상했기에 함부로 우산을 들 수 없었다는 얘기를 하던 모습이 기억납니다.

2000년 고향에서 국회의원에 출마해 낙선한 경험이 있고, 이후 케이웨더 이사로 활동하며 케이블 TV 기상정보채널인 웨더뉴스채널에서 '김동완의 기상뉴스'를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날씨는 우리 삶에 매우 중요한 영향을 끼칩니다. 우리 삶과 날씨의 관계를 잘 보여주고 설명했던 기상통보관 김동완 씨께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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